기러기(2)...사랑은 외기러기
동민 여러분~ 시방 태풍 민들레가 북상중입니다. 100년만의 폭우로 남쪽 지방은
난리라고 합니다. 모두모두 주의하기시 바랍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80년대에
을지부대 맹호대대에서 소대장님으로 예편하신 분, 군단 보안대장을 물먹이신 분,
군단표창장을 수상하신 분을 찾습니다. 군에서 까마귀 라면을 즐겨 드셨던 분을
찾고 있습니다. 비도 오는데 또 삼천포로 빠집시다.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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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를 보면 ‘사랑은 외기러기’ 노래가 생각납니다.
♬사랑은 외기러기 외기러기 영자야 제대하는 그날까지 마음만은 지켜다오~
시방 아래에 그 노래가 나오고 있습죠. 코러스도 삽입된 주옥같은 명곡입니다.
옛날 먼 옛날...
제가 해병대에 지원하고 나서 영장을 들고 부모님께 이야기했더니, 저 삐리리가
해병대에 가서 맞아 죽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80년 1월 23일 친구 6명이
울산에서 진해훈련소 정문까지 버스를 타고 같이 마중을 하러 와 주었습니다.
그 친구 중의 한명에 ‘김민석’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가장
친한 친구이지요. 어!하면 아!하고 필이 통하는 친구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이 친구
집에 얼마나 빈대를 붙었던지 방학이면 그 집에 가서 아예 죽치고 살았습죠.. 특히
이 집
반찬이 맛이 있었지요. 저는 집이 울산 외곽이라서 시내에 놀러가면 그 집이
우리집이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알았던 사실이었지만 그 당시 방학이면 그 집에서
쌀을 두가마니 소모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당신 아들내미 친구들 밥먹인다고...
말이 쌀이 두가마니이지 엄청나게 남의 집 살림 축을 냈던 것입니다.
이 친구가 현재 유일하게 국방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 현재 중앙일보
군사전문기자(부장급)
으로 일을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를 보시는 분들은 기사 하단에 눈여겨 보시면
‘김민석군사전문기자‘라는 글을 보실 수 있을겁니다. 군사 관련기사에서는
항상 나옵니다.
나중에 이 친구를 통해서 철원 근처에 비무장지대에 새를 한번 찍으려 가보려고 합니다.
추선생님도 한번 꼽싸리 낄 의향은 없어신지요? 아니면 추선생님 빽으로 비무장지대를
가던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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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군에 가서 이병시절(6개월)은 완전히 고문관이었습니다. 이병을 넘어 일병 2호봉까지도
고문관이었지요. 그 주된 이유는 내가 왜 이런데 와서 나보다 나이도 어린 고참에게 하인 노릇을 해야하는 반항심이 가장 컸습니다. 마음이 삐딱하니 행동이 똑바로 될리도 없고
많이 얻어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병 3호봉 시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여기 고참들도 월급 3천8백원 받고 끌려 온 것 아닌가. 알고 보면 다 같은
신세이다. 나이 불문하고 나보다 먼저 왔으니 대우를 해줘야 정상이다. 그래
어차피 하는 군대생활 좀 더 움직여 잘해보자. 고참 세무워카도 정성껏
고무가루를 묻히고, 고참이 일어나자 말자 바로 침상을 닦자. 좌우지간
내무실에서는 앉아 있을 생각을 말자.‘
그 뒤로부터는 정말 바지런하게 움직였지요. 훈련나갈 때는 4시반에 일어나서
복도에서 고참 무장은 미리 말아 두었고, 잔머리를 굴려서 알아서 했습니다.
잔머리도 굴리니까 윤이 나서 잘 돌아가더군요. 정말 소같이 일했습니다.
이렇게 딱 한달을 하니까 몸은 고달팠지만 고참들이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더
군요. 일병 4호봉 때부터 내무반 살림을 거의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그 후는
집합당해서 전체가 얻어터질 때는 터졌지만, 집합후는 고참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괜찮냐라는 식으로 물어도 보고 등도 두드려 주었습니다. 딱 한번
요령꾼 고참으로부터
목욕탕에서 줄창나게 얻어 맞아 금복주얼굴이 된적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맞았던지 세면장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까 눈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습
니다. 맞은 사유는 이 고참이 자기가 요령을 피우려다 오해를 한것같은데
상세한 내막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이것말고 개인적으로 크게 맞았던
기억은 없습니다.
상병 달고부터는 중대장의 신용을 쌓아서 여러 가지 잡무를 많이 했지만
크게 욕들어 먹은 기억도 없고 아주 정이 들었습니다. 제대 일주일 남겨놓고
4박 5일 휴가도 받았습니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제대 말년에 그 당시 이범석 통일부장관(이분은 아웅산사건에서 순직합니다)이
사단을 방문했는데 대대기동훈련 시범을
우리 대대가 보여야했습니다. 중대장이 산마루에 중간중간에 에 TNT를
묻어놓고
터트리는 역할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 때만해도 대학생 출신들이
해병대에 잘 없었고 지는 기계과 출신인지라 그 일을 맡겼습니다.
중대장이 브리핑 하면 그 타임에 맞춰
스위치를 눌러 터트려야합니다. 문제는 폭약이 오래되서 그런지 잘 안터져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폭약이란게 쉽게 안터집니다.. 그러면 전쟁놀이 실감도
안나고 실컷 연습한게 엉망 되버립니다. 일전에 미군 장성 앞에서 다른 사병이
하다가 TNT가 안터지는 바람에 이런 개망신
을 당한 적이 있어서 중대장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박병우 고민을 좀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 먼산까지 통신 삐삐 단선만으로 연결
하는게 저항치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지난번의 불발 이유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옆 대대에 가서도 삐삐선을 모조리 빌려왔습니다. 우리 대대 통신 애들이 삐삐선
드럼통을 메고 산을 몇 번이나 오르락 내리락하여 TNT 한 개소당 선을 6가닥을
깔았습니다. 또 사단 탄약고에 가서 TNT를 수령하면서 뇌관을 한뭉치당 세 개씩
붙였습니다. 하나가 안터지면 다른게 터지라고 말이지요. 대대장 연대장은 실수만
하지마라고 직접와서 난리인데 예행연습을 해보니 이산 저산 곳곳에서 그야말로
지축이 울릴 정도로 터지더군요. 꽝꽝꽝!!!
‘아싸~’
모두 좋아서 싱글벙글이었습니다. 그날 밤 대대 상황실에서 TNT에다 뇌관을
정성스럽게 조립하고 아침에 가서 산에다 곳곳에 연결하고 풀섶으로 위장했
습니다.
이범석 통일원장관이 오시고 자리에 앉으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물론 저는 사열대 아래쪽 방안에 숨어 있고 스위치만 잡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해병 73대대 중대장 대위 강경구입니다. 지금부터 소대 기동
훈련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방금 전방 산중턱 8부능선에 배치된 적의 공격이 시작되
었습니다.
이 순간 박병. 바로 스위치를 누른다. 쾅~~~!!! 덮어두었던 풀섶이 하늘로 나르고
천지를 진동하는 TNT 굉음이 사열대를 흔들었더라. 기동훈련 30분에 묻어두었던
TNT를 100% 폭발시켰더라.
그 당시 뇌관을 터트리는 밧테리는 24볼트로 기억하는데 이것도 병렬로 몇 개나
달아서 원거리까지 저항손실에 의한 전류치 감소가 없도록 한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군대나 어디나 머리를 쓰야되겠더군요. 머리는 이발소에 가라고 있는게 아니란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