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68년 서울..

by 낙동강 posted Oct 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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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진이 있었군요.

68년도 겨울이면 1.21 사태가 일어난 시점입니다. 1.21사태란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을 말하지요. 68년도 1월달에 북한의 124군 부대의 정예 장교들로 이루어진 유격전 특수부대는 미군 관할지역의 서부전선 DMZ인 임진강을 모포로 둘러쓰고 건넜습니다. 이들 전원은 성분이 가장 좋은 함경도 출신이었으며 실전적인 훈련을 받았는데, 황해도청을 청와대로 가장하여 최종 리허설을 실시한 바 도청을 습격하여 도지사(인민위원장)를 살해하고 인민위원장의 머리를 잘라서 부대로 가져옵니다. 물론 노동신문에는 남조선의 특무들이 침입하여 살해했다고 보도가 됩니다.

즉 이들의 임무는 목표는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대통령을 살해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임무 완수후는 당일로 문산을 거쳐 휴전선을 넘는 계획이었습니다. 청와대 습격 시간은 저녁 8시로하고 습격 소요시간은 3~4분 그야말로 전광석화와같은 기습 공격 계획이었습니다. 1~4조로 나누어 청와대 청사 1층, 2층, 경호실, 비서실, 정문보초를 동시에 살상 파괴하고 운전조는 차량을 탈취하여 당일로 탈출하는 시나리오였습니다.

서부전선을 넘은 이들은 경기도 고양군 법원리의 삼봉산에서 첫 숙영을 하게 되는데, 동초를 서고 있었던 동료가 나무꾼과 우연히 조우했다고 보고를 합니다. 긴급히 회의를 열어 나무꾼을 체포해오기로하고 나무꾼을 잡아오는데 두사람의 형제였습니다. 이들이 우씨 형제입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온 농부들이었으니 눈이 멀뚱멀뚱하게 세상에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줄 알지?’

‘아찌들은 산에서 훈련하는 군인 아찌들 아닌가요?’

‘맞다 맞어~ 그런데 솔직히 정체를 밝히자면 우리는 북쪽에서 내려왔거든~’

북에서 내려왔다니까 새파랗게 질린 이 형제를 포박해놓고,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회의가 벌어졌습니다.

죽일 것이냐 살려줄 것이냐?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시간만 가고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민간인과의 조우시의 행동지침을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겨울철 산속으르만 이동하는 속전속결의 작전계획이었으니 민간인들을 만난다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팀장이 제안을 합니다. 민간인들의 처리 여부를 대원들끼리 투표로 결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투표 결과는 팀장을 제외하고 15대 15로 딱 반반이었습니다. 결국 팀장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때 하늘이 도왔으니....

‘오빠~ 어디 있어요? 빨리 내려오세요~! 오빠~ 오빠~ 나무 그만하고 내려오세요!’

산 아래에서 나무꾼을 찾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서 들려왔습니다. 이 외침을 들은 팀장은 결국 살려 주기로 결정합니다. 여동생의 외침이 두 사람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에이~ 살려 보내자. 그대신 너희들이 경찰에 신고하면 너희 가족들은 몰살이다. 신고 안하면 통일이 되면 너희들은 영웅이 된다. 알았지!’

‘예~ 내려가서 절대로 신고 안하겠습니다.’

이들을 살려보낸 김신조 일당은 초인적인 스피드로 서울을 향해 산악행군을 했습니다. 물론 살아돌아간 우씨 형제들은 신고를 하여 아군에서도 비상 경계령을 발동하여 저지선을 폈는데 이들의 행군속도가 워낙 빨라서 이미 저지선을 돌파하고 난 뒤였고, 이들의 행방 확인에는 실패합니다. 이들은 앵무봉,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0일 밤 10시에 드디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릅니다. 여기서 첫 검문을 받게되고 방첩대원들이라고 속이고 행진을 하는데, 몇 백미터를 전진하다고 최총경 이하 경찰 병력과 마딱거리게 됩니다.

‘우리는 방첩대원들이므로 신분증도 없고, 우리 부대로 가는 길이다.’

‘그래도 일단 경찰서로 모두 가셔야합니다.’

이 순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판단한 무장공비 팀장은 외칩니다.

‘사격 개시! 모두 해산!’

기습 사격에 최총경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청와대를 몇백미터를 앞에 두고  모든게 엉망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들은 버스안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민간인 승객들을 살상하기도하면서 전 서울을 벌집 쑤시듯이 쑤시다가 소탕되었는데, 김신조 한명이 생포되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김신조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내레 박정희 목 따러 왔시오~’

이 육성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습니다. 이래서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그 때 군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제대 특명이 나지 않아 무려 5년간 군대생활을 해야했다는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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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위의 명동거리 사진에서 차량 뒷 모습 중 한대는 시보레가 확실하고, 한대는 코로나 승용차라고 보여집니다. 코로나는 일본 토요타와 기술 제휴하여 부산 신진자동차에서 제작했는데 시발택시 이후 본격적인 택시용 승용차였습니다. 기어가 운전대 옆에 장착되었고, 차체는 약했지만 소음이 적은 차였습니다. 이러다가 토요타가 철수하고, 현대에서 포드와 기술제휴하여 코티나가 출시되고, 기아자동차에서는 퍼블릭카가 출시되었습니다. 요위의 삼륜트럭도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차라 기억됩니다.

이 때 유행한 노래가 배호가 부른 ‘비내리는 명동’이었니....

그 때의 명동거리가 과연 저랬단 말인가요? 낙동강은 촌에서 살아서 명동거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만, 비내리는 명동 노래는 잘 흥얼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때가 초등학교 4년이었는데 애창곡이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비내리는 명동’이었는데 아쉽게도 차중락과 배호는 두사람 모두 요절하고 말았으니... 아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비내리는 명동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사나이 두 가슴 흠뻑 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믿었다 잊지 목하고~~/ 사나이 가슴속엔 비만 내린다~~

사진 잘 보았습니다.

후다닥~!!!==3==3==3